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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네가 미치도록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by.뿌숨




가끔 네가 미치도록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뿌숨이 씀




승관이는 3살 때 부모님을 여의고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소년이야어린 몸 하나 기댈 곳이라곤 전혀 없던 승관이는 남의 눈치만 보다 결국 제대로 웃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지그리고 오늘은 17살 승관이가 18번째 친척집으로 가는 날이번에 가게 된 집은 어머니의 아버지의 동생의 뭐라던 아주 먼 친척 집이야자식이 없다는 친척 노부부의 다정한 손길에 이끌리듯 자동차에 올라탔지한참이나 달린 차가 멈추는 느낌에 살풋 든 잠에서 깬 승관이는 차창너머의 시골 풍경이 낯설었어하지만 우리가 함께 살 집이라며 미소 짓는 친척 부부의 얼굴에서 이번엔 어쩌면 행복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


승관이는 사람을 사귀는 것에 서툴러친해지면 떠나야만 했으니까친척 부부의 집에서도전학 간 학교에서도 습관적으로 만들어낸 웃음만 보였지여전히 혼자인 승관이는 학교가 끝나면 마을 근처 산들을 돌아다니면서 시간을 보내다 집으로 들어가곤 했어오늘은 어떤 산에 놀러갈까 생각하며 걷는데 자그마한 노란 꽃들이 산 입구에 빼곡이 피어 있는 거야승관이는 홀린 듯 꽃길을 따라 산으로 들어가지.


들어온 산은 승관이가 지금껏 보고 들었던 어떤 풍경보다도 아름다웠어맑은 시냇물을 따라가다 작고 노란 꽃들이 잔뜩 핀 언덕의 커다란 소나무 그늘 아래 누운 승관이는 이곳이 너무 맘에 들었어그날 이후 승관이는 매일같이 산에 찾아가어떤 날은 음악을 듣고어떤 날은 책도 읽고또 다른 날은 낮잠도 자겠지커다란 소나무가 있는 이 산에 승관이는 산이라는 이름도 지어줬어평상시처럼 소나무 아래로 향했는데그늘 아래 누가 하늘을 보며 서있는 거야승관이는 놀라서 걸음을 멈췄지만 그 사람은 마치 승관이를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돌렸어.  

내 산에 매일 들어서는 너는 대체 무어냐.”  


승관이는 당황했지만 눈 동그랗게 뜨고 나름 침착하게 쏘아붙이지나는 만날 산에 오는데 그쪽을 한 번도 본적이 없는데 왜 그쪽 산이냐고쫑알쫑알 받아치는 승관이의 모습이 흥미로웠는지 그 사람은 다음날부터 승관이 앉아있는 소나무 아래에 찾아왔어그렇게 둘은 점차 말을 트게 되는데 대화를 하다 보니 이상한 점이 한 두개가 아니겠지또래의 얼굴을 하고 나이가 2000살이 넘었다는 둥 산이 자기 집이라는 둥그 중에서도 가장 이상한 건 이름이 없다는 점어떻게 이름이 없을 수 있냐는 물음에 나를 부르는 이가 없어서라 담담히 대답하는 그 얼굴이 슬퍼 보인다고 생각한 승관이가 한참을 고민하다 말했어.

여기는 솔산이니까… 너는 한솔이 어때?

지어보이는 그 미소가 산신에게는 햇빛보다 더 반짝이겠지


그 후로 시도 때도 없이 한솔아한솔아 불러대는 승관이가 한솔이는 신기할 거야산신인 그는 인간을 지켜보지만 했지 직접 얘기해본 적은 처음이었거든분명 처음에는 내가 산신이다 말해도 그저 꺄르르 웃어가며 어깨를 치는 그 애가 흥미로울 뿐이었어그런데 흥미가 관심이 되는 것은 금방이었지같이 낚시를 하러 시내로 가는 길에 신이 난 듯 흥얼거리는 그 작은 노랫소리가고개를 까닥이는 그 뒤통수가 귀엽다고 생각해버린 거야소나무 아래 낮잠 자던 자기 옆에 몰래 다가온 그 애를 모르는 척 눈감아주다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려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동자와 마주했을 때 붉어지는 그 얼굴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하게 된 거야관심이 사랑이 된 순간이었지


승관이가 눈치를 보지 않아도억지로 웃지 않아도 한솔이는 언제나 그 자리에승관이의 옆에 있어 주었지서로에게 유일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그러니까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는 것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멋진 일이었어그 멋진 일은 당연하다는 듯 승관이의 많은 것을 바꾸었지한솔이 덕분에 집에서도학교에서도 승관이는 자신을 위해 살 수 있게 되었어자연스럽게 주위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었고 돌아갈 나의 집과 가족이 생겼어그렇게 승관이는 한솔이를 만나 평범한 행복을 가질 수 있었어


솔산에 노란 꽃이 세 번이나 피고 졌어승관이는 고등학교 삼학년이 되었지사실 이런 시골에서는 대학을 다닐 수 없기 때문에 승관이는 진로에 대한 고민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중이야물론 대학 가고 싶지 당연히그런데 한편으로는 소중한 것들로 가득한 이곳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어갈팡질팡 흔들리는 승관이를 볼 때마다 한솔이도 씁쓸했지그러던 어느 무더운 여름날의 밤승관이는 대뜸 솔산을 찾아왔어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나무 아래 눕겠지가만히 밤하늘만 올려다보는 한솔이에게 승관이가 말했어.

한솔아.

.

나 많이 생각해봤는데여기서 너랑 쭉 같이 있고 싶어그래도 돼?

한솔이는 눈물이 날 것 같았어소중한 것들이 많이 생긴 승관이와는 다르게 한솔이는 정말 승관이 하나밖에 없었거든자신을 선택해달라고영원히 내 옆에서 계속 있어달라고이젠 너의 산이 되어버린 이 산을 떠나지 말라고 마음속으로는 하루에 열두번도 더 넘게 바랐던 한솔이야결국 눈물을 보이는 한솔이를 끌어안고 같이 우는 승관이둘은 그 여름날에 소나무 아래에서 서로에게 가장 가까이 닿았겠지.  


세상에 영원히라는 말을 지킬 수 있는 이는 몇이나 될까한솔이랑 승관이에게도 영원은 없었어승관이는 인간이었기 때문에십년이십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한솔이와는 다르게 승관이는 행복했던 시간들을 새겨 넣으며 하루하루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지

다음에는다음 생에는 소나무 아래의 너를 내가 먼저 알아볼게꼭 그럴게한솔아.

솔산 소나무 아래 한솔이의 품에 안겨 승관이는 고요하게 눈을 감았어한솔이는 힘이 빠진 그 몸을 몇 번이고 다시 고쳐 안았지만.



고속버스 안 한솔의 한참 뒤에 앉은 승관이는 지금의 상황이 매우 못마땅해태어나고 보니 이미 친구였던그야말로 불0친구 한솔이가 오늘도 자신과의 약속을 깨고 볼일이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야어렸을 때부터 자주 혼자 몰래 어디를 다녀오던 한솔이었지만 요새 그 정도가 더 심한 것도 같았지승관이는 제일 친한 친구라 생각하는 한솔이가 자꾸 자기한테 비밀로 하고 뭐하는지 궁금하고 또 섭섭했어사실은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던 한솔이가 혼자 다니는 게 걱정되는 마음이 컸어그래서 이번에야말로 한솔이 뒤를 밟아야겠다고 다짐했지.


도착한 곳은 한적한 시골 동네였어망설임 없이 훅훅 걸어가는 한솔이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산이었는데가지만 앙상한 나무들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침울한 산이었어승관이는 얘가 여기서 뭘 하려고 그러나 싶어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앞서가는 한솔이를 열심히 따라갔지하지만 걸음이 빠른 건지 아님 이곳이 익숙한 건지 결국 한솔이를 놓치고 말았어길을 잃은 승관이는 찬찬히 산을 둘러봤어그런데 뭔가 그리운 거야길을 잃어버렸으면 무서워야하는데 오히려 집에 돌아온 것처럼 안정된 느낌이었어뭐지 싶으면서도 익숙한 듯 발을 옮기는 자기가 너무 신기해서 발 가는대로 향한 곳은 휑한 언덕 한가운데에 우뚝 선 커다란하지만 시든 소나무였어


눈물이 막 나왔어자기가 왜 우는지도 모르는데 그냥 울었어소나무 아래 서있던 한솔이가 앞에 와 섰어승관이는 그제야 한솔이를 알아본 거야한솔이는 승관이를 당겨 안았어.

미안해미안해 승관아기다리려고 했는데 만약에정말 만약에 네가 길을 못 찾아올까봐너를 잃은 내가 너무 변해서 네가 못 알아볼까봐그래서 내가 먼저 찾아갔어내가 네 옆으로 갔어.” 

한솔이를 마주 안으며 울고 있는 승관이는 알고 있을까수없이 많은 나날들 속을 너와의 추억 속에 살던 그가 가끔은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는 걸수 없이 많았다는 걸.